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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

토기(태토, 성형, 소성)

by 버미무이 2023. 5. 22.

 

 

선사시대 이전부터 가벼운 유기물질로 만든 용기를 사용하였으리라 짐작한다. 신석기시대 이전에 토기 그릇이 없는 이유는 주로 구석기시대 수렵채집민들의 이동식 생활양식 때문인데 무거운 소성 점토 용기는 그들에게 별로 쓸모가 없었을 것이다. 토기의 도입은 일반적으로 좀 더 정주적인 생활양식이 채택됨과 동시에 일어나며 그러한 생활에서는 내구성이 있고 튼튼한 그릇과 용기들이 필수적이다. 고고학자들은 오랫동안, 특히 절대연대측정법이 등장하기 전까지 주로 토기를 편년 지표로 사용하면 형태 및 장식의 변화에 근거하여 형식 변천 연구를 하였다. 이러한 측면들은 아직도 예컨대 지표조사 결과로부터 유적을 평가하는 데서 대단히 중요하다. 하지만 좀 더 최근에는 석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관심의 초점이 원재료의 산지를 식별하는 연구와 토기 안의 찌꺼기를 식단에 관한 정보원으로 삼는 연구, 그리고 무엇보다도 토기의 제작 방법과 용도에 대한 연구 등으로 바뀌었다. 제작에 관한 한 우리가 제기해야 할 주요한 질문들은 점토 기질의 구성성분들은 무엇인가? 토기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그리고 소성 온도는 어느 정도인가?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태토 조절제

토기 표면을 관찰만 해도 점토 속에서 태토 조절제라 부르는 혼입물 (점토에 내구성과 가공성을 더하고 소성 시의 균열이나 수축을 막기 위해 넣는 첨가물)을 때때로 식별하게 된다. 태토 조절제로 가장 흔하게 이용되는 물질들은 으깬 조가비, 암석, 토기, 모래, 풀, 짚, 혹은 해면 조각 등이다. 미국 학자 고든 브로니츠키와 로버트 하머는 실험을 통해 여러 가지 태토 조절제들의 특성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으깨어 구운 조가비가 거친 모래 혹은 굽지 않은 조가비보다 토기를 급격한 열 변화나 충격에 더 잘 견디게 만들어주며 그다음으로는 가는 모래가 가장 좋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또 태토 조절제가 미세하면 할수록 토기는 더 강해지며, 신대륙 여러 곳의 고고학적 기록은 시간이 흐를수록 좀 더 미세한 태토 조절제를 쓰게 되었다.


토기의 성형

토기를 물레 혹은 회전판 위에서 제작 혹은 '성형'하는 방법은 가장 빨라야(메소포타미아에서) 서기전 3400년 이후 도입되었다. 아직도 세계 일부 지역에서 쓰이고 있는 그 이전의 방법은 일련의 점토 띠나 테를 손으로 서리거나 쌓아서 토기를 만드는 것이다. 토기의 내면 및 외면을 간단히 관찰해도 대게 제작 방법을 식별할 수 있다. 물레 성형 토기들은 나선형의 얕은 돌대와 침선을 가지는데 이는 그냥 손으로 빚은 토기에는 없다. 이러한 흔적들은 도공이 토기를 회전판 위에서 뽑아 올릴 때 손가락 끝에서 생긴 것이다. 토기 외면에는 납작한 두들개를 친 자국들이 남을 수가 있는데 때로는 이를 천으로 싸서 토기 표면을 두드려 단단하고 매끈하게 마무리하는 데 사용함으로써 그 천 자국들이 남기도 한다. 

 


토기의 소성

소성 기법은 완성품이 지닌 몇 가지 특징으로부터 추론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표면이 유리질화 되어 있거나 유리 같은 광택이 나면(즉 유리 같은 외양을 가지면) 그 토기는 900도 이상으로 소성된 것이며 아마도 실요에서 소성되었을 것이다. 또 토기의 산화(점토 속의 유기물질들이 타버리는 작용) 정도도 소성법의 지표가 될 수 있다. 완전히 산화되면 태토 전체에 걸쳐서 균일한 색이 만들어진다. 만약 어떤 토기편의 속심이 회색이나 검정 등 어두운색이면 소성 온도가 너무 낮아 점토가 완전히 산화되지 못했거나 소성 시간이 불충분하였던 것으로 흔히 노천요의 사용을 나타낸다. 또 노천 소성은 '불 구름'이라 불리는 얼룩 같은 표면 색변을 일으키기도 한다. 여러 가지 반죽 흙을 여러 가지 온도로 그리고 여러 유형의 가마에서 소성해 보는 실험은 예기할 수 있는 색깔과 효과에 대한 지침을 제공한다. 미국 학자 W. D. 킹어리와 제이 프라이어만은 소성 온도 추정에 꼭 맞는 한 가지 접근법을 불가리아 동시대 카라노보 유적에서 출토된 흑연 도기 편에 대해 적용하였다. 그들의 방법에서는 과거에 소성할 때 미세 조직에서 불가역적 변화가 일어났을 온도까지 표본을 재가열함으로써 원래 구워졌으리라 추정되는 온도의 최고한도를 설정한다. 전자주사현미경으로 검사해본 결과, 이산화탄소 분위기에서 700도로 가열하자 미세조직에서 약간의 변화가 나타나고 800도에서 한 시간 가열한 후 현저한 변화가 일어났지만 900도에서는 점토가 유리질화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흑연 도기가 원래 800도 이하에서 소성되었으며, 아마도 700도쯤에서 소성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결론지을 수 있었다. 이러한 연구성과는 여러 문화의 기술력, 그중에서도 특히 야금술의 숙달에 관련된 기술력을 평가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 가마터의 고고학적 연구는 그간 소성 과정에 관한 우리의 지식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예를 들어 태국에서는 고온 소성의 '석기'가 11세기부터 16세기 사이에 대량 생산되어 동남아 일대와 일본 및 서아시아에 교역되었다. 그러나 당대의 문헌들은 그 산업에 관해 아무런 언급도 없다. 이 조사 사업에 참여한 오스트레일리아와 태국의 고고학자 및 과학자들은 두 도시 시사트차날라이와 수코타이가 가장 중요한 생산 중심지였음을 발견하고 전자의 주변 마을들을 발굴해서 수백 기의 대규모 가마들을 노출한 바 있는데 그 가마들은 흔히 앞 시기의 붕괴된 가마 위에 겹쳐져서 때로는 퇴적층의 깊이가 7m에 달하였다. 이 가마 유형들의 층서는 가마 형태와 축조법의 발전과정을 밝혀 주었는데, 초기의 조잡한 진흙 구조물로부터 고품질 수출 도자에 필요한 한충 높은 소성 온도를 얻을 수 있는 기술적으로 발전된 벽돌 구조물로 변해갔다. 후대의 가마들은 토단 위에 지어 젖은 땅으로부터 격리함으로써 일 년 내내 생산이 보장되었고 이는 또한 그 산업에 대한 수요가 그만큼 증가하고 있었음을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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